좋은 시

화양연화(花樣年華) - 이병률

백합공주 2022. 9. 25. 15:48

 

화양연화(花樣年華) - 이병률

 

 

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

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

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

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

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

 

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

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

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

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

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

돌을 져 나르는가

 

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

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

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

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

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

어두운 방 불도 켜지 않고

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

 

 

*시집,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, 문학동네